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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라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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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하라 신조는 일본 제국 시대의 관료로,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족원 사무국 서기관, 내무성 참사관 등을 역임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장, 충청남도 장관, 농상공부 장관을 지냈으며, 와카야마현 지사와 니가타현 지사를 역임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에서 지방 행정 개편을 주도했으며, 와카야마현과 니가타현 지사 재임 중 긴축 예산 편성을 실시했다. 은퇴 후에는 행정법 관련 저서를 다수 출간했으며, 1910년 정5위, 1940년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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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라 신조

2. 일본에서의 생애 및 경력

도쿄부 출신으로 니가타현 서무과장을 지낸[3] 오하라 미노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97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과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12월, 문관 고등시험 행정과 시험에 합격하여 귀족원 사무국에 들어갔다.[1][4]

1915년 3월 31일 박중양의 사퇴로 공석이 된 충청남도 장관직으로 부임하였다. 1916년 8월 충청남도 장관으로 재직 시 미풍양속 보호 및 유지, 지방 개량을 목적으로 향약을 본따 각 부, 군에 진흥회를 조직하고, 마을 단위로 진흥회 지부를 조직하게 했다. 1916년 10월 28일 조선총독부 농상공부장으로 부임하여 1919년 8월 20일까지 재직하였다.

이후 마쓰에시에 은거했지만, 1931년 애국부인회 사무총장에 취임하여 1942년까지 재임했다.[2] 1932년 9월 27일, 킨케이칸 지코를 명받았다.[5]

2. 1. 내무 관료 시절

1898년 귀족원 사무국 서기관 겸 내무성 참사관에 취임하였다. 이후 아오모리현 사무관, 나라현 내무부장을 역임하였다. 1900년 4월부터 1906년 3월까지 약국방 조사회(調査会) 참사관을 겸임하였고, 1902년 12월부터 1903년 4월까지는 내무성 참사관을 역임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장으로 부임하여 지방국장 겸 지방국 2과장을 겸임하였다. 1913년부터 총독부 내무부 지방국 제1과와 제2과에서 군, 면, 동리의 통폐합을 위한 준비를 치밀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내무부장인 우사미 가쓰오(宇佐見勝夫)와 지방국장 오하라 신조가 집행의 중추 역할을 맡아 군·면뿐만 아니라 동리 단위의 지도 초안까지 만들어 통폐합을 강행했다. 그 결과 군은 317곳이 220곳으로, 면은 4,336곳이 2,522곳으로, 동은 6만여 곳이 2만 8천여 곳으로 통폐합되었다.[8]

2. 2. 와카야마현 및 니가타현 지사 시절

1920년 2월, 와카야마현 지사에 취임하였다. 불황 속에서 긴축 예산 편성을 실시하였고, 재정난 속에서 1923년 군제 폐지에 따라 군립 시설의 현립으로 이관을 추진했지만, 현 관리의 인원 정리나 소모품 등의 감액을 피할 수 없었다.[1] 1923년 6월, 니가타현 지사로 전임되어, 1925년 10월 18일 지사를 사임하고 퇴관했다.[3][4]

3.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활동

1897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과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12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뒤 귀족원 사무국에 들어갔다.[1][4] 1898년 귀족원 사무국 서기관 겸 내무성 참사관이 되었다. 이후 아오모리현 사무관, 나라현 내무부장을 역임했다.

1910년 조선총독부로 전임되어 내무부 지방국장, 충청남도 장관, 총독부 농상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1][2]

3. 1.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장 시절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장으로 부임하여 지방국장 겸 지방국 2과장을 겸임하였다. 1913년부터 총독부 내무부 지방국 제1과와 제2과에서 군, 면, 동리의 통폐합을 위한 준비를 치밀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내무부장인 우사미 가쓰오와 오하라 신조 지방국장이 집행의 중추 역할을 맡아 군·면뿐만 아니라 동리 단위의 지도 초안까지 만들어 통폐합을 강행했다.[8] 그 결과 군은 317곳에서 220곳으로, 면은 4,336곳에서 2,522곳으로, 동은 6만여 곳에서 2만 8천여 곳으로 통폐합되었다.[8]

3. 2. 충청남도 장관 시절

1915년 3월 31일 박중양의 사퇴로 공석이 된 충청남도 장관직에 부임하였다.[8] 1916년 8월 충청남도 장관으로 재직 시 미풍양속 보호 및 유지, 지방 개량을 목적으로 향약을 본따 각 부, 군에 진흥회를 조직하고, 마을 단위로 진흥회 지부를 조직하게 했다.[8] 1916년 10월 28일 조선총독부 농상공부장으로 부임하였다.[8]

3. 3.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장관 시절

1915년 3월 31일 박중양의 사퇴로 공석이 된 충청남도 장관직에 부임하였다. 1916년 8월 충청남도 장관 재직 시 미풍양속 보호 및 유지, 지방 개량을 목적으로 향약을 본따 각 부, 군에 진흥회를 조직하고, 마을 단위로 진흥회 지부를 조직하게 했다.[8] 1916년 10월 28일 조선총독부 농상공부장으로 부임, 1919년 8월 20일까지 재직하였다.

4. 저서

제목출판사출판 연도
행정법각론 (行政法各論)
행정법범론 (行政法汎論)
행정법총론
오하라 신조옹 고희기념초 (小原新三翁古稀記念草)1942년
행정법 각론도쿄 법학원1899년
범론 행정법일본 법률학교1900년
일본 위생 행정법 요의일본 경찰 강습회1901년
국법학 요의미즈노 서점1901년
행정법 범론박문관1902년
행정법 각론박문관1902년
제국 의회 부현회 군회 시정촌 의원 필휴박문관1903년
위생 행정법 석의킨코도1904년
중등 교육 법제 교과서일본 대학1906년
일본 경찰법 범론시미즈 서점1909년
지방 의회의 도의화 및 지방 자치오사카야 호 서점1926년
오하라 미노오와 동기미 부인: 부 사카키바라 나오코 부인의 추회오하라 신조1926년


5. 서훈

1940년(쇼와 15년) 8월 15일 -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7]

참조

[1] 서적 新編日本の歴代知事
[2] 서적 和歌山県史 人物
[3] 서적 新編日本の歴代知事
[4] 서적 日本官僚制総合事典:1868 - 2000
[5] 간행물 官報 1932-09-28
[6] 간행물 官報 1910-12-21
[7] 간행물 官報 1941-10-23
[8] 웹인용 ⑨3·1운동, 면사무소를 불태워라 http://www.imaeil.co[...] 201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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